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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탁월한_사유의_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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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교수가 건명원에서 한 강의의 모음이다.

철학자는 보통 어려운말을 하고,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을 것 같으나 최진석 교수는 현실에 관해서, 철학이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관해서 말한다.

가장 인상적인 결론을 말한다면

- 대답은 중진국, 후진국이 하는 것이고 질문은 선진국만이 할 수 있다. - 사람도 마찬가지, 가장 앞선 사람이 질문한다, 대답만 하는 사람은 남이 연구한 결과를 따라만 할뿐이다. - 철학의 높이가 그 나라의 현실적 위치를 결정한다. 철학적 사고가 깊은 나라일 수록 선진국이다.

하나의 지식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해서 재사용하거나 거기에 몰두하고빠져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하거나 효요성을 따지는대신 그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따지고, 그것이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작동과 활동성을 보려고 한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둘 중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컴퓨터가 발명되자 어떤 사람은 그 컴퓨터를 사용하고 소유하는 일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컴퓨터의 사용보다도 그 컴퓨터로인해 전개될 새로운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질 사회의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역시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p.87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에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한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p. 89
“장자”를 읽고감명을 받았으면, 장자처럼 사는일을 꿈꾸기보다 오히려 자신도 장자가 사용했던 높이의 시선을 지금 자신의 시대에서 사용해보려고 덤빌 일이다. p.91
레고는 원래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었는데, 그 컨설팅 회사의 조언에 따라 기존 질문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아이들에게 놀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p.92
이렇듯 레고 블록의 탄생과 같은 새로운 시선, 높은 시선이라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것과의 결별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철학을한다는 것, 철학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탁월한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파괴' '자기부정'의 과정을 그냐말로 필수적이다. p.93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바꾼다. 아니면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세계를 철학적 시선이 가장 앞서 포착한다고 말 할 수도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든 아니면 세상의 변화를 높은 차원에서 먼저 인지하든, 철학은 적어도 우리에게 세계의 변화 자체를 인지시키고 거기에 반응하도록 하는 힘을 갖게 한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혁명가며 문명의 깃발로 존재한다.
그래서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이다. … 판 자체를 보기 때문에 새판을 짤 수 있다.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생산해놓은 것을 따라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만 한다.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삶의 격을 결정한다. 그 지성의 극처에 철학이 있다. p.99
철학 생산국들은 그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구성한다. … 그들의 철학은 모두 그들의 시대에서 태어났다.
이와 달리 철학 수입국들은 그 구성된 내용을 수용하기 때문에, 기성품으로서의 이론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세계를 거기에 맞추려고 한다. 진리의 터전은 구체적인 세계인데, 만들어진 이론을 진리로 착각한다.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철학적인 이론을 꽂피우지 못하고, 수입된 철학 이론으로 자신의 세계를 관리하려 덤비는 것이다. 그러니 생산국에비해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p.101
(철학 수입자는) 자기가 그 이론을 이해했는지 아닌지혹은 그 이론이 지시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로 축소된다. 자신이 수입한이론만을 진리로 품게된다. 이로써 스스로는 이론의 대행자로 존재하지, 자신을 둘러싼 구체적인 세계에서 문제를 발견하려는 호기심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살지 못한다. 이러다가 단절적인 개인 수양 속으로 쉽게 빠져들기도 한다. p.102
모든 철학은 다 시대의 자식들이다.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시선이바로 철학이다. 모든 철학은 다 각기 그 시대를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담겨 있던 바람 소리나 시장의 소란이 땀 냄새들은 모두 빼버리고 관념적인 논의나 도덕적인 주장들만 받아들여 교조적으로 내면화한다. p.103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린다.
질문은 이와 다르다. 질문이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야만 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 자신에게만 있는 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 이것이 질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질문 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p.118
질문과 대답은 대립적인 한 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두 행위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한마디로 대답은'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p. 118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는 독립적 주체성을 갖는 '질문하는 사람'은 자기 행위의 책심성이 자신에게 있으니 시민의식도 더 높을 수밖에 없다 p.119
선진 시민이란 독릭접 주체성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 자기 스스로 독립적 주체로 책임성 있게 존재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비율이 많아지면 당연히 선진국이 된다. 반면에 자기 독립적 주체성보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가치에 자기 자신을 더 의탁하면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는 길이 막힌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의식이 약할 수밖에 없다. p.120
스스로 생각해냈다는 이 점으로 탈레스는 최초의 철학자가 되었다. 모두들 만물의 근원을 신이라고 '믿을' 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생각'했다. p.142
탈레스는 믿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인간에게 생각의 세계로 이동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신의 지배하에 있던 인간에게 자기 스스로의 세계를 열도록 부추겼으며 신화에 갇혀 있던 인간에게 '철학'이라는 광명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최초로 말이다. 역사의 책임성을 신에게 미루던 인간들이 이제 스스로 역사의 책임자로 등장하였다. p.143
철학하는 일이란 남이 이미 읽어낸 세계의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읽을 줄 아는 힘을 갖는 일이다. p.148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쓴 박훈 교수는 그 책 안에서 서양의 외압에 반응하는 일본의 태도를 '과장된 위기의식'이라고 표현한다. 강제 개항 등과 같은 일련의 압력에 대하여 일본이 실제 내용보다 훨씬 더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민함이 좀 떨어진 문화권의 사람들 눈에는 제국이나 선진국의 예민함이 좀 호들갑스럽게 보이거나 지나치게 보일 수 있다.
후진국은 세계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항상 사태가 발생해야만 그때부터 대응하기 시작하는 습성이 있다. p.174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건강한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건강할 것이고,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더욱 건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p.176
장자는 기존 관념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관념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관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관념을 지배한다. 그래서 장자는 자신의 주인으로 존재한다.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다. 박에 대한 기존의 용도에 갇히지 않고, 본 적도 없는 거대한 '박'에게 '배'라는 새로운 용도를 연결시키지 않았는가? '박'의 외연을 '배'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p.184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기존에 있는 모든 합리성으로부터 이탈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다. 왜 생각들이 항상 합리성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는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모가 날 수도 있고 거칠 수도 있다. 모가 나고 거친 그 길을 가면 왜 안 되는 것인가? 왜 그 길이 내 길이면 안 되는 것인가?
합리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꿈을 꾸자. 꿈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있는 관점들로 명료하게 해석되어 합리적으로 보이거나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다. 착실한 계획일 뿐이다. 꿈은 원래 거칠고 비합리적이며 돌출적이다. p.198
철학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사유하지 사유의 결과를 사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유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높은 시선으로 세계와 직접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있는 모든 이론들은 세계에 접촉하려는 여행길에 봉사시키려고 데리고 다니는 노비다. 부디 그것들이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바란다. p.202
독서/탁월한_사유의_시선.1704638067.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4/01/07 23:34 저자 kwon37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