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 흔한 “김지혜”가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이야기.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게 아니라, 특별하지 않아도 나는 나라는 발견.
당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보통은 해. 가끔 덤벙대기도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있어'정도면 충분하다. 그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이다. 특히 대단한 보람이나 연봉,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일수록.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인 걸까. 아니면 꿈이 없는 사람인 걸까. p. 42
“그랬군요. 그런데 사실 난 가끔 궁금해요. 우리가 욕하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입장에 놓였을 때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비판하는 건 쉬워요.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 상식을 잣대 삼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이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순간에 놓이면 존엄성과 도덕, 상식을 지키는 건 소수의 몫이 돼요. 내가 그런 환경과 역사를 통과했다면 똑같이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뭔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어떤 노력이요?”
“적어도 내 몫을 위해서만 싸우지는 않겠다고 자꾸자꾸 다짐하는 노력이요. 마음에 기름이 끼면 끝이니까.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더 나은 어떤 것을 향해 차츰 다가가고 있기만을 바랄 뿐이죠.” p. 80~81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기만 해도 세상이 조금쯤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 p. 82
미안해. 나 아줌마들이 애 낳고 힘들단 뻔한 소리 하는 거 정말 듣기 싫었거든. 근데 그 힘듦의 본질을 깨달았어. 그냥 육체가 힘들고 잠을 못 자서가 아니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화장실 가는 그 몇 초. 밥 한 숟갈 목구멍 넘기는 그 순간. 냉장고 문 열고 물 한 번 마시는 그 잠깐. 그런 순간조차 좌절돼. 그런 사소한 행동이 하나하나 저지당하고 울음과 떼쓰는 소리로 멈춰지고 그런 게 반복되잖아? 사람이 미친다. p. 100
제 삼자가 들으면 우리나라 미쳤다고 하는데, 그냥 그 안에서 직접 하루하루 겪으면 그렇게 드라마틱한 일도 아니더라. p. 102
언젠가 그런 얘기를 아빠한테 했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겪어보지 않고 쉽게 말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답이 돌아왔다.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세대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그런 걸 보면 삶을 관통하는 각박함과 고단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적인가보다. p. 127
언뜻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향점으로 삼기에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바는 너무나 부실하고 흔하기 짝이 없었다. 새해 첫날 스타벅스에서 녹차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읽은 뒤 중고 장터에 내놓으면 딱 좋을 책이었다. p. 149
지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나도 지혜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지혜는, 그냥 지혜였다. 내가 백사장에 깔린 모래알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그 애는 고유명사였고 굵은 대문자로 써진 이름이었으며 오로지 그녀 그 자체였다. p. 152
나는 그 애의 심복이었고, 초라하지만 버리기엔 유용한 도구였으며, 우린 친구잖아, 라는 말 한마디에 쉽게 설득되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친구는 이런 게 아니잖아. 먼저 그렇게 말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p. 156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담아놓은 채 화살을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거요. 이렇게 돼버린 지 참 오래됐어요.” p. 176
키스의 결말은 씁쓸했지만, 공윤에게 큰 소리로 말한 것까지 무의미한 결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공윤은 변함이 없었지만 달라진 건 나였다. 그날, 고작 돌아서서 울었던 나였다. p. 186
어쨌든 그 일은 내게 꽤 큰 교훈을 남겼다. 속내를 감추지 않고 단지 겉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 점에서, 부끄러운 키스를 나눈 규옥에게 나는 여전히 감사하고 있었다. p. 187
“우린 나무를 잘라 가구를 만드는 하드웨어적인 일을 하지만, 우리의 가구를 쓰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거든요. 그건 소프트웨어적인 영역이죠. 그러려면 자양분이 좀 필요한데 어떤 자양분을 섭취해야 할지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어요. 그게 바로 지혜 씨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혜 씨가 튼 음악을 듣고 지혜 씨가 추천한 영화를 보고, 지혜 씨가 좋아하는 책 속의 구절이 우리에게 영감을 줄 겁니다. 결국 지혜 씨의 취향이 우리 회사의 취향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가구는, 그런 거름 없이 만들어진 가구보다 조금쯤은 멋지지 않을까요.” p. 192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p. 232